24 7월, 2009

퀴즈쇼, 김영하


[귓속말 : 언인텐디드요. 실은 지금 듣고있어요.]

바로 그 시각, 젊은이들이 잠들기엔 조금 이른 그 시각에, 인기있는 이 뮤지션의 음악을 함께 듣고 있을 사람이 아마 전 세계에 수십만 명은 될 것이다. 서울만 해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벽 속의 요정’과 내가,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세계의 어느 구석, 작은 퀴즈방에서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똑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 이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는 게 그렇게 어리석은, 혹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어떻게 인간은 노래를 부르고 듣는 종이 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인류가 참새나 개구리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처럼 다양하고 풍성한 음악을 만들고 즐기는 종으로 진화해왔다는 것은. 나는 인류진화의 전 과정, 그리고 음악이라는 예술을 발전시켜온 선조들과 이 노래를 불러준 ‘뮤즈’의 매슈 벨러미에게 감사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예를 들어 ‘벽 속의 요정’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멀고먼 도시에 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같은 음악을 동시에 듣고 있다는 것, 하나의 노래로 두 영혼이 서로 이어져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아, 인간은 외롭지 않구나.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구나. MP3 플레이어와 이어폰, 달팽이관과 대뇌 그리고 CPU, 랜카드와 랜선, 지하의 광케이블을 따라가면 그 곳에 나와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누군가가 역시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것이다.

- 김영하 <퀴즈쇼> 中



총 400페이지의 소설 내용가운데, 민수가 회사에 들어가는 부분은 300페이지가 넘어가서였다. 조선일보 연재분을 챙겨 보며 이제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그 부분이 사실은 끝나가는 시작 지점었던 셈이다. 작가의 의도보다 앞부분이 너무 길어져버려서, 혹은 뒷부분이 너무 짧아져버려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건 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300페이지 전 까지는 작가 스스로 무척 즐기면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쓰고싶은대로 하고싶은 말을 맘껏, 멋지게 늘어놓아서, 연재분을 읽는 동안 한 회 한 회가 모두 하나의 단편과도 같이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었으니까. 누군가는 너무 장황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고, ‘지면낭비’라고 비꼬는 것도 일면 이해가 가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문장을 좋아하니까. 나쁘지 않다. 이 부분,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고 블로그에 옮기고 싶은 부분도 많고, 공감간다고 말하고 싶은 부분도 많아서, 연재중엔 매일 작가의 홈페이지를 드나들며 사람들이 반응을 보고 감상을 공유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민수와 벽속의 요정 얘기 가운데에서는 저 뮤즈의 언인텐디드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가장 좋았었다. 일전에 사람들과 대화한 적도 있지만, 온라인으로 누군가를 만나 연애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 연애는 오죽하겠는가) 사실 내 경우는, 내가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가 온라인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대화하며 설레는 저 부분이 남 얘기 같지 않았고, 좋아하는 뮤지션에 대해 얘기하며, 같은 음악을 듣고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저 느낌이 낯설지 않다. 해당 뮤지션이 안 유명하고 매니악할수록 그 ‘희열’은 배가 된다. (…)

같은 뮤지션을 좋아하고, 같음 음악을 듣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가슴이 벅차 ‘인류가 음악을 듣게 된 종이라는 사실’에 까지 감사하는 표현이 나 까지 들뜨게 만든다. 아직도 결말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서 오랫동안 혼자 삐쳐있기까지 했지만) 중반부까지는 참 좋다. 전체적인 메시지보다는 문장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취향때문일지. 역시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다. 애증의 김영하.


19 3월, 2009

태엽감는 새,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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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태엽 감는 새님. 태엽 감는 새님은 자기 자신을 비우면서까지 잃어버린 구미코 씨를 구하려고 애썼어요. 그리고 ‘어쩌면’ 구미코 씨를 구할 수도 있었지요, 그렇죠? 태엽 감는 새님은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구했어요. 하지만 자신은 구하지 못한 거에요. 그리고 다른 누구도 태엽 감는 새님을 구할 수는 없었어요. 태엽 감는 새님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힘과 운명을 있는 대로 모조리 써버린 거에요. 그 씨앗은 남김없이 어딘가 다른 곳에 뿌려 졌어요. 주머니 속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런 불공평한 일이 어딨어요? 난 진심으로 태엽 감는 새님을 동정하고 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결국 태엽감는 새님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던 거에요. 내 말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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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사격 솜씨가 서툴렀던 건 아니네. 단지 자네는 나를 죽일 수가 없는 거지. 자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네. 그래서 자네는 기회를 놓친 거라네. 안됐지만 자네는 내 저주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겠군. 알겠나? 자네는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질 수 없네. 자네는 앞으로 남을 사랑하는 일도 없고, 남에게 사랑받는 일도 없을 걸세. 그게 내 저주지.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겠네. 그러나 그건 호의 때문은 아니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죽이겠지. 그러나 나는 필요 없는 살인은 안 하네. 잘 가게, 마미야 중위. 1주일 후에는 자네는 여기를 나가서 나홋카로 향하겠군. 즐거운 여행이 되길! 이제 다시는 자네를 만나는 일도 없겠지.”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새> 中



드디어 <태엽감는 새>를 다 읽었다.

중간에 책을 한 권 잃어버리기도 하고, 어쨌든 꽤 긴 시간이 걸린 것 같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분량을 읽기가 힘든 책이었달까. 읽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공허해지고, 우울해지고, 외로워졌다. ‘태엽감는 새’ 님은 항상 혼자였다. 직장도 나가지 않았고, 거의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고, 대화하지도 않았다. 아니 누군갈 만나거나 대화하는 일이 있더라도, 혼자 있는 것 보다 썩 나은 상황이 아니었다.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마저도 가위로 잘리듯 툭 끊어지고 말았다. 손에 잡히는 정확한 이유도 없이, 어떤 싸움과 다툼도 없이. 몇가지 희미한 징조들만 스쳐 지나갔을 뿐. 손에 잡히지 않는, 확실하지도 않은 관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가운데에, 그는 많은 것들을 빼앗겨 버렸고, 다시 찾으려는 과정에 자기 자신마저도 빼앗겨 버린 것 같다. 절망적이다.

마미야 중위의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그가 보리스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을 읽고 잠들었는데 정확히 그 상황이 꿈 속에서 플레이되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약간 술에 취한 채 기분이 좋아 보이는 보리스와, 그를 죽이려고 총을 꺼내는 마미야 중위. 실탄 두개를 건네며 나를 죽이라고 말하는 보리스와, 그 두 발을 모두 실패한 마미야 중위와, 그에게 저주를 내리는 보리스.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마미야 중위의 떨리는 눈빛과, 보리스의 의연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의 공기와 이미지는 내 뇌리를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이로서 하루키가 쓴 소설은 모두 읽었다.


10 1월, 2009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 Pretended, Star-crossed lovers





“<스타크로스트 러버즈>, 듀크 엘링턴과 빌리 스테레혼이 오래전에 만든 곡이지. 1957년이었든가.”
“스타크로스트 러버즈” 하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운명을 잘못 타고 태어난 연인들. 불행한 연인들. 영어에는 그런 말이 있소. 우리는 흔히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유하지. 엘링턴과 스트레이혼은 온타리오의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서 연주하기 위해 이 곡을 포함한 조곡(組曲)을 작곡했던 거요. 오리지널 연주에서는, 조지 헛지스의 앨토 색소폰이 줄리엣 역을 연주하고, 폴 곤잘베스의 테너 섹소폰이 로미오 역을 연주했었소.”
“운명을 잘못 타고 태어난 연인들” 하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어쩐지 꼭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곡 같네요.”
“우리가 연인인가?”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시마모토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이미 미소는 가시고 없었다. 그 눈동자 속으로 어렴풋한 광휘 같은 것이 보일 뿐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中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내가 비교적 초반에 읽은 하루키의 책이고,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너무너무 좋아서 다른 책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말 10번도 넘게 반복해 읽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후 <양을 쫓는 모험>과 <댄스댄스댄스>에 깊이 빠지게 되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소설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다시 잡은 이 소설은 다른 하루키의 소설과는 또 다른 형태의 흡인력을 느끼게 했다. <노르웨이의 숲>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주인공의 감정이 농도 짙게 와 닿아서 첫장을 읽기 시작할 때 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까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 

샅샅이 내용을 기억할 만큼 자주 읽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이 소설에 나왔던 음악들 중 인상적이었던 것을 다시 하나하나 찾아보기도 했다. 위에 올려 둔 ‘스타크로스트 러버즈’와 냇 킹 콜의 ‘프리텐드’가 그 음악들 중 하나. 눈을 감고 들으면 잠시나마, 어린 하지메와 시마모토가 소파위에 앉아 이 음악을 듣고있는 모습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