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1월, 2012

[현재와 미래의 인간] 의 과거

난 지극히 오늘과 오늘이후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를 마주할 때, 드물게 뒤를 돌아보는 일이 있지만 기억나는 게 많지 않다. 좀 더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산다.  몇 년 전에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연히 만나면 못알아 볼 정도.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나는 몇 년간 동고동락하며 같이 서클활동을 했던 아이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그들 중 만약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당황스러운 일일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차곡차곡 쌓아놓은 견고한 시간 위에 서 있는 게 아닌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다. 그러고서 그냥 하늘만 본다.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나의 특징 중 하나일 뿐.

가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는 얘기를 듣는다. 부럽다고도 한다. 나는 별로 어렵지 않다고 얘기한다. 휴대폰번호 바꾸는 거나, SNS 친구끊기, 흔적을 지우고 물건을 버리는 일들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 된다고. 그 과정에서 필터링된 사람들과, 관련된 일들은 자연스럽게 옅어진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쨌든 현재의 사람들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냉정하다는 얘기도 한다. 나는. 넌 사실 잊고 싶다지만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은 거 아니냐고 답한다. 단순히 내 생각이지만, 과거를 모두 끌어안고 있으면 현재와 미래를 볼 여유가 줄어들지 않을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 앞으로 함께 보내게 될 시간들. 이런 것들이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하고 소중한 만큼 항상 '현재'로 지켜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걸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결정한 것들은 잊지 않고 기억하려 애쓴다. 그 지점에 특정 플래그를 꽂듯. 앞으로의 삶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어떤 순간].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를수록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그 때 써 둔 글을 다시 읽어도, 감정의 무게를 정확하게 다시 재기는 힘들다.

그런 나에게 최근에 만난 사람들이 나의 과거를 상기시켜주는 일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꽤 중요한 - 플래그를 꽂을 만한 - 일인데도 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

이를 테면 20대 중반에 받았던 몇 달간의 우울증 치료 같은 것. 몇 가지 테스트. 꽤 높은 수준의 강박증과 우울증, 불면증 진단을 받았었고. 약물과 상담치료를 병행했던 일. 그 때 내가 보였던 증상들. 약을 먹고 서서히 잠들던 느낌. 편두통. 우울증이 완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던 내 목소리. 상담실의 의자.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 [조금... 심각한 것 같네요. 당분간 계속 병원에 오셔야겠어요.] 갑자기 그 모든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당황스러웠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 선상에 놓고 생각하기가 힘들어서. 20대 중반의 나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살고싶지 않았었데. 난 그걸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진지하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지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절반정도의 학점을 억지로 채웠다. 학교는 그냥 [힘들었고], 그 감정을 제외하면 크게 남는 게 없었다. 분명하게 상처를 받았던 이야기들은 기억에 남는다. 공부만 잘하지 특별한 관심사나 특기도 없는 애들이 오는 경영학과. 행정고시 커트라인에 못 미치는 토익성적. 그냥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 넌 나이가 많아서 공채 쓰기 힘들겠다. 너 아직도 학교다녀? 좀 심한거 아니야? 

난 그냥 단순히 2008년 어딘가에 플래그를 꽂고. 회사에서든 어디서든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땐, 2008년 그 때 보단 덜 힘들잖아, 라고 위로의 도구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어렵게. 다시 학교를 다니기로 결정하고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던 27살(2009년)을 기억(기념)하기 위해 아이디 뒤에 27을 붙였다. 정확한 과정들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때 부터 조금씩 나아졌던 것 같다. 아니, 나아지기로 마음먹은걸까. 천천히, 시간을 두고.

어쨌든 그렇게 루저였던 내가. 지금은 회사도 다니고, 잘 살고 있어요. 그런 간증 같은 걸 하고싶은 건 아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난 정말 아무 생각없이 공중에 떠 있었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잃어버렸던 퍼즐조각을 가지고 있었던 게 신기했고, 조금은 고마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한 기억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아예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그 때 힘들었던 나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아 퍼즐조각을 모아 그림을 만들고 플래그를 꽂았다. 기억할게. 그렇게 죽고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들. 그리고 몇년 채 지나지 않아 지금처럼 건강하고 대체로 즐겁게 지내는 현재의 내 모습까지. 다시 힘들어지는 시간이 오더라도 다시 나아질 수 있는 희망으로 삼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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