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6월, 2013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 그의 미소


그가 사려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특별한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 - 혹은 직면한 듯 - 한 뒤,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바로 그만큼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호의적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달받았노라 확신시켜주는 미소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미소는 홀연 사라져버렸다.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中



<위대한 개츠비>? 재미 없어요. 이 책을 세 번 읽으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친구가 될 수 있다죠? 저는 아무래도 하루키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네요. 라는 글을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보게 된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1) 위대한 개츠비 재미없어 2) 무라카미 하루키도 별로 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일 듯. 억측을 더하자면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정도만 읽으려고 시도했을 거라는 데에 천원 쯤 건다.

물론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며 존중받아 마땅하므로 둘 다 재미없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선 내가 잘 이해가 안되는 지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그의 언어로 저 말을 한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에 대한 얘기는 그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은 주인공 와타나베도 아닌 그의 기숙사 선배 나가사와이다. 들어나 봤나 나가사와? (어쨌건 그 둘은 <위대한 개츠비> 때문에 친구가 되고 밤에 기숙사를 빠져나가 이런저런 일들을...)

무라카미 하루키와 <위대한 개츠비> 에 대해 얘기하자면, <위대한 개츠비>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바 있고, 그의 역자후기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소설과 작가' 라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그거랑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고 하루키와 친구하는 거랑은 전혀 다른 얘기라고.

그리고 여기에 +1. 최근 김영하 작가의 번역으로 <위대한 개츠비> 가 새로 나오면서 그냥 '그 소설 재미없어' 를 넘어선 또 다른. 김영하 작가의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안티글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었다. 이번엔 '그 소설 재미있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합세했는지, 번역이 아니라 거의 새로 쓴 거나 마찬가지라느니 하는 비난까지 끼얹어졌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일단은 김영하 또한 하루키 만큼,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작가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한국 작가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바로 김영하.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새 '개츠비' 를 구입해서 아껴가며 읽었다. 김영하의 문장으로 개츠비를 읽을 수 있다니! 나는 축복받은 독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모두 개츠비를 번역하고 개츠비를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나도 좋아해 개츠비! 그리고 피츠제럴드도! 그러는 가운데 적지않은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개츠비, 하루키, 김영하, 그리고 나를 둘러 싼 채 '흠, 글쎄 난 별로'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그럴수록 조금 더 즐거운 기분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책의 마지막 16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역자후기는 '죄 없는 확신범 스콧 피츠제럴드의 변호를 기꺼이 맡아 새로운 번역으로서 변론을 대신할 것을 결심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그의 변론이 정말 좋았다. 그의 다음 변호인과, 변론이 기대될 정도로.

피츠제럴드는 행복하지만은 않은 짧은 삶을 살다 갔고 <위대한 개츠비> 역시 바로 빛을 보지 못했으며, 현재까지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대한 개츠비> 를 재미없어, 라고 평한다. 하지만 지금 정상의 위치에 선 작가들이 그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책을 읽는 동안,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위대한 피츠제럴드, 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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